일본 현장에서 일한 지 한 달쯤 됐을 때, 리더가 저를 작은 회의실로 불렀습니다. 뭔가 잘못했나 싶어 긴장하고 들어갔는데, 나온 말은 의외였습니다. “일은 잘하고 계신데요, 진행 상황을 좀 더 자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일하던 방식대로, 맡은 일은 끝낼 때까지 혼자 챙기고 다 됐을 때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일본 현장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비친 겁니다. 기술적으로 막힌 건 하나도 없었는데, 일하는 방식에서 어긋난 셈이죠.
현장마다 분위기는 다르고, 요즘은 스타트업처럼 자유로운 곳도 많습니다. 그래도 제가 거친 일본 현장 대부분에서 비슷하게 만났던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익숙해진, 그러나 처음에는 어색했던 것들을 적어봅니다.

아침 회의
대부분의 현장에는 매일 아침 10분에서 15분짜리 아침 회의(朝会)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씩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 곤란한 점을 말하는 형식이라 스탠드업 미팅과 비슷합니다.
처음에 제가 헷갈렸던 건 진척을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로그인 화면 70% 정도입니다”처럼 말했는데, 리더가 매번 “그럼 예정대로인가요?”라고 되물었습니다. 리더가 알고 싶었던 건 퍼센트가 아니라, 마감에 맞출 수 있는지였던 겁니다. 일본 현장에서는 일정대로인지(予定通り), 늦어지고 있는지(遅延)를 먼저 말하고, 늦어진다면 얼마나와 이유를 붙이는 방식이 훨씬 잘 통했습니다.
늦어지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처음에는 꽤 부담스러웠습니다. 프리랜서라 모자라는 인상을 주면 갱신에 영향이 있을까 걱정도 됐고요. 그런데 격어보니 반대였습니다. 일본 현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건 늦어지는 것보다, 마감 전날에야 늦어진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흘 전에 말하면 리더가 다른 사람을 붙이거나 일정을 조정할 수 있으니까요.
회의록
일본 현장에서는 회의가 끝나면 회의록(議事録)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보다 무엇이 결정됐고, 누가 언제까지 무엇을 할지를 적는 문서죠. 나중에 “그때 그렇게 정했잖아요”라는 말이 나오면, 이 문서가 근거가 됩니다.
어느 현장에서는 제가 이 회의록 담당이 됐습니다. 주간 회의에서 제일 말이 적은 사람이 맡는 분위기였는데, 그게 저였죠. 외국인에게 맡기는 게 맞나 싶어서 조금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첫 회의록은 발언을 거의 그대로 받아 적어서 A4 세 장이 나왔고, 리더가 돌려준 수정본은 반 장이었습니다.
그 반 장을 보고 회의록을 다시 배웠습니다. 결정 사항(決定事項), 할 일(TODO)과 담당자, 기한, 다음에 이어서 이야기할 것(継続検討)으로 나눠 적고, 논의 과정은 정말 필요할 때만 한 줄 남기는 식이었습니다. 회의 당일 안에 올리는 것도 암묵적인 규칙이었고요.
억울했던 그 담당이 결과적으로는 제 일본어를 가장 많이 늘려줬습니다. 매주 일본어로 회의 내용을 요약하다 보니, 몇 달 뒤에는 회의 중에 논점이 어디로 흘러가는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회의에서 제가 말하는 횟수도 늘었고요.
호렌소
일본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단어가 호렌소(報連相)입니다. 보고(報告), 연락(連絡), 상담(相談)의 앞글자를 따온 말인데, 신입사원 연수에서 배우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걸 회사원을 위한 말이지 프리랜서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어느 금요일이었습니다. 맡은 기능의 API 사양이 문서와 달라서, 저는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보려고 하루를 통째로 붙잡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상황을 설명하자, 리더가 서버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10분 만에 답이 왔습니다. 문서가 예전 버전이었던 겁니다. 리더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30분 막히면 일단 어디서 막혔는지만이라도 알려주세요”라고 했습니다.
프리랜서에게 호렌소는 오히려 더 중요했습니다. 준위임 계약이라 제가 혼자 헤매는 하루도 발주처 돈으로 나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장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잘하는지보다,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는지를 더 가벼게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막혔다고 알리는 것이 실력이 없다는 고백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지금은 하루에 한 번, 퇴근 전에 오늘 한 일과 내일 할 일을 슬랙에 세 줄로 남기고 퇴근합니다. 누가 시킨 건 아니고 제가 정한 습관입니다. 처음 한 달에 리더가 저를 불렀던 그 작은 회의실 이야기는, 그 뒤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